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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하늘/도서리뷰

도서 리뷰 : 패권의 대이동 | 지금까지 세계의 패권은 어떻게 넘어갔을까

2021. 9. 27.

도서리뷰-썸네일

 

안녕하세요. 유월입니다.

 

오늘은 김대륜 작가님이 쓰신 "패권의 대이동"이라는 책에 대한 독후감을 써보려고 합니다. 이 책은 아메리카 대륙을 찾은 스페인이 최초로 글로벌 패권을 가지게 된 후, 그 패권이 네덜란드로, 영국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미국으로 넘어가는 역사에 대한 분석을 담은 글입니다.

 

그럼 스페인부터 미국까지 단계별로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스페인 제국의 흥망

 

1469년 10월 19일, 카스티야의 계승 서열 1위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연합왕국의 계승자 페르난도 2세는 바야돌리드에서 은밀하게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것은 스페인의 역사를 넘어 세계사의 큰 파도를 만들었습니다.

 

스페인 제국은 혼인이나 상속 또는 외교를 통해 영토를 확장해나갔고 카를 5세가 왕이 될 당시엔, 스페인, 신성 로마제국(독일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남부 지역을 비롯해 콜럼버스가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까지 제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어온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은 스페인 제국의 엄청난 자산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광활한 영토를 가진 스페인 제국이 쇠퇴한 이유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스페인 제국은 혼인이나 상속을 통해 확장을 해온 국가라 중앙집권적이고 효율적인 재정 정책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은 농업기반의 봉건사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농업기반의 사회는 생산력을 크게 향상하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국가의 전체의 생산력을 높히는 방법이 제국의 입장에서는 영토 확장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런 방식의 확장을 계속하다 보니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늘어나게 되면서 결국 봉건사회의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을 착취해 들어온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스페인 제국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었으나,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진 이후로 이마저도 무너지게 되어 스페인은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네덜란드의 흥망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스페인은 천문학적인 전쟁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네덜란드는 그 기간동안 계속해서 성장의 길을 이어나갔습니다. 이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작고 작은 네덜란드는 어떻게 이 열세를 극복하고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부흥을 이뤘을까

 

네덜란드의 영토는 농업을 하기에 유리한 땅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식량과 맞바꿀 상품을 만들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사고 팔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즉, 근대적인 도시가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네덜란드에서 먼저 발달하게 됩니다. 수공업자들이 식량과 교환을 하기도 하며 다른 곳의 상품을 파는 중개 무역을 하는 등 국제적인 무역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네덜란드는 군사 개혁을 통해 전투력을 향상시켰고, 전쟁을 뒷바침하기 위한 재정 체제를 새로 마련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다르게 영토를 확장하는데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최우선 목표는 네덜란드의 무역기반을 보호하는 것이였습니다. 스페인과의 독립전쟁 이후 네덜란드 상인이 아시아와 대서양에 진출하는 것을 돕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효율적으로 전투력을 향상시켰다고 하지만 군사비 지출이 늘어나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네덜란드는 과거 스페인이 소수의 은행가에게 돈을 빌려 고생한 것과는 다르게 장기 채권을 발행해 은행가가 아닌 부유한 국민들로부터 자금을 모았고, 그 결과 채권 시장에서 거래가 활발해지며 새로히 성장한 금융업과 상업을 바탕으로 네덜란드는 성장했습니다.

 

이런 군사력을 바탕으로 포르투갈이 선점한 무역 거점을 차례대로 빼았고, 향료 원산지를 무력으로 장악하여 유럽으로 가는 향료 공급을 완전히 독점하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무력의 사용은 네덜란드의 상업패권의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다만 스페인과 차이가 있다면, 통행세나 지역 지도자에게 공납을 받던 기존 방식과는 다르게 네덜란드는 공급처를 무력으로 점거해 유럽 시장에서의 이윤을 확보하는 데 주력 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핵심적인 이유는 네덜란드는 기본적으로 상업에 모든 것을 의존한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농업기반의 스페인이 한계를 맛 본것처럼 네덜란드는 무역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네덜란드 무역의 주 고객층은 유럽의 봉건 귀족이였습니다. 당시 유럽 전체의 경제가 안좋아지면서, 향료같은 사치품의 수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새롭게 인도산 면직물, 차, 커피같은 새로운 상품 무역은 네덜란드가 이전과는 다르게 독점적인 지위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면직물을 생산하는 인도나 차를 생산하는 중국은 네덜란드가 쉽게 정복할 수 없는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네덜란드가 고전을 하고 있을때,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근대 국가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네덜란드처럼 국가 전체가 상업에 힘을 집중하는 움직임, 즉 중상주의의 시대가 온 것 입니다. 초기에 네덜란드는 사실 경쟁에 있어 비교적 우월한 지위에 있었지만 국가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규모의 한계 때문에 네덜란드는 이 경쟁에서 뒤쳐지게 됩니다. 200만의 인구를 가진 느슨한 연방국가인 네덜란드가 강력한 왕의 통솔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2300만의 프랑스 같은 나라와 맞서 싸우기는 쉽지 않습니다.

 

네덜란드는 17세기 이후 패권을 상실한 이후에도 부유한 국가로 남습니다. 다만 네덜란드의 문제는 계속된 성장을 하지못하고 정체를 맞이했습니다. 상업에 모든 역량이 집중된 네덜란드였기에 제조업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고, 이런 현상은 18세기까지 지속이 되면서 네덜란드 자본은 금융시장으로 눈을 돌렸고, 거기서 모인 자본은 영국으로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영국의 부상

 

사실 네덜란드가 독립을 하게 된 가장 큰 계기중 하나가 스페인이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잉글랜드는 그 당시 네덜란드보다 뒤처지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정치적 불안정이 가장 큽니다. 영국은 제임스 1세부터 찰스 1세까지 종교와 헌정 질서를 두고 수 많은 내전을 치뤄왔습니다. 올리버 크롬웰이 내전의 혼란을 극복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영국은 본격적으로 중상주의 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나는데 이건 정치 혁명 그 이상으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영국은 과거 네덜란드처럼 국채를 발행해 자금을 유통하고, 법률로 세금의 일부를 국채 이자를 지불한다는 법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이 통치하던 시절에는 왕이 이 법을 수시로 바꾸고 법을 어기는 행위가 흔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명예혁명을 통해 왕은 의회의 허락없이는 과세를 할 수 없고, 왕이 마음대로 의회를 해산하고 소집하지 못하게 박아둔 것 입니다. (권리장전) 그 결과 영국의 국채는 이전보다 훨씬 높은 신뢰도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큰 돈을 금융시장을 통해 조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그 이외에도 영국은 재산이나 소득에서 세금을 내는 직접세가 아니라 부가가치세 같은 간접세를 도입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실제로 조세 부담액이 프랑스보다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세 저항이 비교적 적고 거두기가 쉬웠습니다. 그리고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거두는 것에서 만큼은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인력을 대규모로 충원하고 조직도 새로 정비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재정-군사 국가의 성공 사례로 꼽습니다.

 

그러나 이것들도 사실 영국 경제가 버텨줘야 가능한 사실입니다. 영국 경제는 도대체 어떻게 버틸수있었을까요. 바로 제조업입니다. 네덜란드는 단순히 사치품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면, 영국은 자국의 농업과 제조업을 발전시켜 내수 시장을 성장시키고, 자국의 상품을 팔 수 있는 식민지라는 국외 시장이 있었습니다.

 

영국이 발견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에는 아쉽게도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처럼 금이나 은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풍토도 달라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기엔 본국의 물품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본국에 수출할만한 상품은 담배와 사탕수수였습니다. 이렇다보니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플랜테이션 농업이 시작되며 아메리카 대륙은 계속해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수백만의 노예를 데려왔습니다.)

 

인구가 폭증한 아메리카 식민지는 여전히 문화적인 뿌리인 영국의 관습대로 살았기 때문에 본국에서 수입한 상품의 의존도가 높았습니다. 영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수시장이 갑자기 엄청나게 커졌다고 볼 수 있었죠. 이렇게 확대된 시장은 결과적으로 제조업의 성장에 기여했습니다. 이 제조업의 성장은 이후 영국의 산업혁명의 불씨를 일으키게 됩니다. 

 

 

산업혁명과 대영제국의 부상

 

1850년 당시 세계 공업 생산의 25%, 세계 무역의 25%를 차지하는 엄청난 국가였습니다. 이런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정치와 군사 차원에서 다른 나라를 압도해나갔습니다. 영국의 패권을 이해하려면 산업혁명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제일 먼저 일어났는가를 분석해보면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당시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임금이 가장 높은 나라였습니다. 그렇다보니 영국의 자본가는 이윤을 위해 노동력을 줄이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이 당시 영국은 혁신을 추구하는 문화가 노동자부터 귀족까지 퍼져 있었습니다. 귀족들은 자신의 농장은 전문 관리인에게 맡기고 본인은 생산력을 높히기 위한 농법이나 기구에 대한 연구를 하기도 했고, 노동자들 또한 다른 유럽에 비해 제도적으로 문화적으로 지식에 대한 접근 비용이 매우 낮았습니다.

 

게다가 영국 정부는 이런 문화를 장려하고 보호하기 위해 많은 제도와 환경을 만들어줬습니다. 특허 제도가 대표적인 예시이며, 그 이외에도 영국은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이런 정부와 국민들의 노력끝에 영국은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을 이룩하면서 영국은 패권을 가진 나라로 부상하게 됩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생산력은 영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그 어떤 나라보다도 압도적인 지위에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지위에 올라간 영국은 이제 보호무역이 아닌 자유무역을 표방하기 시작합니다. 유럽 열강에겐 자유무역을 끊임없이 설득하기도 했고, 약소국은 무력을 이용해 시장을 동원하도록 했습니다. (청나라 아편전쟁이 대표적 사례)

 

이러한 영국의 전력을 역사가들은 "자유 무역 제국주의"라고 부릅니다. 공식적인 지배보다는 비공식적 영향력 확대를 선호하여, 자국의 무역을 자유롭게 하면서 토착 엘리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시장을 확대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중국과 남아메리카, 오스만제국, 아프리카 일부를 마치 식민지처럼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영제국 또한 쇠퇴하는 시기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주요 자본주의 국가에서 산업혁명을 통해 공급이 폭등하게 되었지만 수요가 더 이상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선 기업의 수를 줄여 과도한 경쟁을 막고, 기업간 수직·수평 통합을 통해 규모의 경제와 범위의 경제를 추구해야하는데, 이런 변화는 산업혁명을 뒤늦게 시작한 미국과 독일이 철강, 전기·전자·화학·기계같은 중화학 공업을 축으로 새로운 혁신을 주도했습니다. 

 

반면에 영국은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방대한 시장을 확보하고 있어서 식민지를 별로 보유하고 있던 미국이나 독일에 비해 굳이 노력을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기존의 상품을 보유한 시장에 팔아도 방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현장의 엔지니어나 장인을 통한 혁신이 대부분이였고, 체계적인 연구 개발에 별로 투자를 하지 않았고, 영국의 자본가들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보다는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버는 금융에 더욱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과학·기술 등에 관심을 두기보단 금융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사회적인 문화가 생기면서 제조업은 계속해서 활력을 잃어가게 되었고 장기적으론 미국과 독일에 추월당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식민지 미국의 성장

 

식민지 시절 미국은 사실 영국의 보호아래 엄청난 성장을 했습니다. 영국도 그 당시 미국을 통해 들어온 수 많은 상품을 통해 돈을 벌게 되면서 사실 미국에 별 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도 영국의 식민지 아래에 있어 받는 불이익보다 이익이 압도적으로 컷기 때문에 굳이 독립을 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그늘아래에서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 미국은 결국 동쪽 해안에 있는 영토만으론 영토가 비좁아지는 사태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서쪽으로 영토를 넓혀가려 했지만, 식민지 사람을 보호하는데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것에 부담을 느낀 영국 정부는 이것을 금지했습니다. 

 

게다가 많은 전쟁을 치루며 부채가 많아진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세금을 더 부과하려고 했으나, 이제 영국의 식민지라는 지위로서의 이익보다 손실이 더 커진 것을 느낀 미국인들은 결국 독립을 위한 전쟁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쟁을 통해 독립을 성취하게 됩니다.

 

이렇게 독립을 하고나니 더 이상 영국을 통한 무역을 대부분 못하게 되자 미국은 제조업의 중요성을 느낍니다. 미국의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후 남북전쟁을 통해 북부가 승리하면서 산업화는 가속화되었습니다. 이 때 미국이 보여준 독특한 면모는 상·공업만 성장을 한 것이 아니라 농업 또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는 것 입니다. 한 마디로 미국은 상업·공업 뿐만 아니라 농업까지 갖춘 엄청난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말 입니다. 

 

 

미국의 패권을 위한 도전

 

19세기 후반 경제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2개의 사건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강철과 석유라는 새로운 원자재, 자동차와 전기로 특정지어지는 2차 산업 혁명과 늘어난 공급에 비해 늘지않은 수요로 일어난 대불황입니다. 경기가 침체되면서 자유무역은 쇠퇴하고 보호무역이 다시 떠오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혁신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던 영국의 패권은 흔들리기 시작한 반면 미국은 자원집약적이고 자본집약적인 기술 혁신을 계속 해냅니다. 이제 농업과 상업을 넘어 제조업도 전 세계에서 가낭 큰 역량을 갖춘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에서 새롭게 등장한 효율적인 대량 생산 체계와 연구 개발에 대한 기업 투자의 확대, 전문 경영인의 등장과 과학적 관리 같은 변화는 계속해서 위력을 발휘하며 결국 미국이 세계 패권을 가지게 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경제 성장은 '창조적 파괴', 즉 혁신으로 기존 산업을 뒤흔들어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고, 그것에서 생산성 향상을 이루어내는 것에 기반한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파괴적 혁신을 이뤄내는 '기업가 문화'가 생기게 되었고, 이러한 문화속에서 카네기, 록펠러, 밴더필트 같은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기업가들이 중심에 선 연구 개발은 이제 누군가의 취미가 아닌 철저한 이윤 추구를 염두해둔 목적지향적인 활동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업의 연구 개발은 나중에 정부 연구소나 대학과 연결되어 미국의 기술 우위를 뒷받침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다만 기술의 혁신만으로 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것에 대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기술의 혁신이 아닌 기업 조직 개편을 통해 기업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 또한 미국의 기업가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유럽의 회복을 도와 내부의 무역을 다시 활성화하고, 세계 주요 국가간의 상호의존성을 높혀 전쟁이 일어나기 힘든 질서를 만드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개방적인 다자간 무역 체제 복구"가 미국의 최우선 목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전범국가인 일본과 독일도 농업국가가 아닌 전후복구를 시키려고 했습니다. 동아시아와 서유럽에서 핵심적인 국가가 경제적으로 회복을 해야 미국도 상품을 수출할 시장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당시 공산주의 이념의 확산을 막을 필요도 있었구요.

 

미국 또한 세계 2차 대전 이후 자유 무역을 표방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과거 영국과는 또 달랐습니다. 미국의 자유 무역 체제는 제조업에 전문화된 나라 사이에 수직적 분업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생산력이 가장 높은 미국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 아래 유럽과 일본 그리고 값싼 노동력을 가진 개발도상국가들이 가장 아래를 차지하는 질서를 만든 것 입니다. 이러한 질서는 국가간 경쟁보단 협력을 불러왔습니다. 이런 질서는 효과적으로 작동하여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세계에 대호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패권은 계속되는가?

 

1980년대 제조업 분야에서 독일과 일본에서 혁신이 계속되는 반면에 미국의 생산성은 저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시대가 저무는 것이 아니는가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고등 교육과 연구 개발 시스템에서 새로운 기술과 지식이 창출되었습니다. 

 

그 덕에 90년대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새로운 기업들이 엄청나게 등장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이후로는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같은 기업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딜레마는 이렇게 파괴적 혁신을 거듭하는 기업이 5%에 불과하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제조업 고용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과 금융 위기이후로 미국의 제조업이 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단순 제조업만 보면 이미 중국에게 추월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이 패권을 쥐기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창조적 파괴의 힘을 중국은 전혀 다른 정치 체제를 통해 이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아직 앞서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이 빠른 속도로 따라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패권은 없습니다. 앞으로 미국과 중국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는 있는 것 같습니다. 

 

 

후기 및 개인 생각

 

세계의 패권이 어떻게 넘어갔는가에 대한 좋은 책이였습니다. 앞으로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 생각해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도 중국의 부상은 굉장히 위협적입니다. 하지만 다른 변수가 있다면 전혀 다른 정치 체제는 장점과 단점이 명확하게 나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정치 체제의 장점은 방향이 옳게 설정되었을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추진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옳지 못해도 빠르게 추진된다는 것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일대일로의 사업이 중국의 패권 경쟁의 첫번째 성공과 실패를 가를 제일 중요한 사건인것 같습니다. 현재 경제적으로 비교적 뒤쳐진 중앙아시아와 중동을 거쳐 육로로 유럽과 연결이 되려고 하고 있고 바다로는 인도와 아프리카와 함께 유럽과의 바닷길 연결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중국은 미국에 패권에 필적할 만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질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많은 난관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전부 중국과 기존에 갈등이 많은 국가들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베트남, 호주, 인도가 이런 갈등에 선봉에 있으며 미국은 이런 국가와 동맹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과의 교류로 발생하는 안좋은 사례가 너무 많이 나왔습니다. 중국이 투자 및 차관 그리고 경제협력을 약속했으나 이게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 심해지면서 해당 국가의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감당하지 못할 돈을 빌려주고, 돈을 갚지못하면 전략적 자산을 중국에 빼앗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다른 나라와 외교적으로 좋지 못한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면 중국은 미국의 합종책에 의해 무너지게 될 것 입니다. 그러니 중국은 또 미국의 동맹을 찢으려는 행동을 하려고 할 것 입니다. (실제로 호주와 미국의 관계를 이간질하다가 현재 호주가 강한 반발을 하게되어 중국과 외교적 갈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대일로의 교역로가 모두 연결되도 문제가 많습니다.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연결한 나라는 정치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국가가 많습니다. 특히 육로의 경우엔 1곳만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연결이 끊긴다고 볼 수 있겠죠. 그렇다면 이것을 유지하려면 중국은 결국 중앙아시아에 군대를 파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과거 유럽과 미국의 해군이 전 세계에 퍼져있던 것 처럼요. 그건 중국의 엄청난 국력 낭비가 될 것 입니다. 

 

저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차이가 미국과 중국의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라고도 믿습니다. 중국 같은 정치체제의 장점도 분명 있지만, 시진핑이 사실상 독재로 넘어가 강력한 지휘를 가진다고 하면 곧 80을 바라보는 시진핑의 후계자라는 새로운 잠재적 문제가 생깁니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정치의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중국의 패권은 한 밤의 꿈으로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민주주의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잘 교육받은 시민의 수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랜 경제 침체와 금융 위기로 중산층이 무너지고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 는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단점을 부각시킬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다른 문제는 바로 오만입니다. 자신의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최고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오만. 미국은 더 이상 세계 최고의 국가라고 하기엔 많은 부분에서 위상이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그런 오만을 접고 현실을 인지하여 낙후된 인프라를 개선하는 투자를 진행하는 등 국가를 리뉴얼하는 작업이 이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재정 정책을 하기엔 이미 과도한 정부 부채를 가지고 있는데 과연 미국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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